통영지원 건널 강이 어디 있으랴-한산신문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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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지혜를 밝혀주는 대행선사의 가르침-① 묘공당妙空堂 대행 선사大行 禪師 행장기行狀記
평생 참나와 실천행을 몸소 보여준 대행 선사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한산신문 승인 2018.02.02 09:02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미망에서 깨어나게 할 수 있을까?
이것은 태고 이래 진리를 깨친 모든 선지식들이 고민했던 문제이기도 하다.
한국 불교계 비구니스님들 역시 지난 세월 중생들에게 삶의 지혜를 밝혀주기 위한 고민과 함께 종단의 발전과 전통 확립을 위해 놀랄만한 행보를 해 왔다. 그 대표적 인물이 대행 큰스님이다. 대행 큰스님이야말로 현대불교계에서 가장 창조적인 선사이자 일반인이 다가가기 쉬운 큰 스승들 중 한분이었다. 깊은 통찰력과 자비심을 지닌 스승으로서, 스님들은 물론이고 일반 불자들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청중들에게 아무런 걸림 없이 다가간 대행 큰스님은 이미 한국사회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존경받은 인물이었다. 대행큰스님이 45여 년 전에 창건한 한마음선원은 오늘날 한국불교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찰들 중의 하나로 45개의 국내지원과 10개의 국외지원을 두고 있다.
2018 무술년 새해를 맞아 한마음선원 통영지원과 한산신문이 손을 잡고 삶의 지혜를 밝혀주는 대행선사의 큰 가르침을 매월 첫째주 연재, 독자들과 함께 만나는 시간을 마련한다. 가장 먼저 현대물질문명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우리에게 대행 선사의 실천행은 과연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대행 선사의 행장기를 통해 독자들과 교감에 나선다. <편집자 주>
스님은 1927년 1월 2일(음력), 지금의 서울 이태원에서 부친 노백천 공과 모친 백간난 님의 3남 2녀 중 셋째인 장녀로 태어났다. 대대로 벼슬이 끊이지 않던 명문 가문의 후손이라 비교적 넉넉한 가세였으나,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의 군대가 강제 해산된 후 부친은 항일 의병에 참여하는 등 일제에 항거하다 모든 재산을 잃고 거리로 내몰리게 되었다.
어린 시절 스님은 가족들과 함께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혹독한 고난을 겪어야 했으니 일곱 살의 스님은 가족들이 먹을 식량이나 땔감을 구하기 위해 산에 있어야 하는 시간이 많았다.
이 같은 혹독한 환경은 스님을 자연스럽게 마음 안으로 집중하게 했으며, 깊은 내면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계기가 됐다. 또한 너나 할 것 없이 헐벗고 굶주려 고통을 겪는 이웃들의 실상을 보면서,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산다는 것에 대한 진한 아픔을 느껴 생에 대한 큰 의문을 품어 그 같은 의정疑情과 내면으로의 몰입은 스님의 나이 9세 때 본연本然의 심지心地의 첫 소식을 접하게 했다.
14세 때 모친을 따라 오대산五臺山 상원사上院寺 부근에 살던 외삼촌 댁에 몇 달 머물면서 한암漢岩 큰스님을 처음 뵈었으며 큰스님께서는 어린 스님을 너그럽게 대해 주셨다.
스님은 일을 할 때나 산을 떠돌 때나 내면에 집중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한암큰스님을 찾아 뵙고 입산 출가入山出家 스님의 나이 23세였다.
이듬해 6. 25 전쟁이 터지자 상경하여 식구들과 함께 잠시 피난살이를 하다 또 산에 들어 공부했으며 인연이 닿으면 다시 산을 내려왔다.
30대 초반 무렵 문득 일대사一大事의 중대한 때가 되었음을 알고 자성自性의 발길을 따라 걸음을 옮기니 서울 경기도 일대를 비롯하여 헌인릉, 청계산을 거쳐 남한산성, 경기도 이천, 강원도 춘천, 영월, 충북 제천 백련사에 이르기까지 수 년의 시간동안 스님은 일체를 다 내던지고 물 흐르는 대로 응하며 산천초목을 집을 삼아 공부했다.
스님은 산으로 돌다 헤진 몸으로 광인 취급을 받고 때론 빨치산으로 몰려 고문을 당하는 등 수없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또한 빈사 상태에 빠져 산길에 쓰러지기를 수십 차례, 그 때마다 죽음의 고비에 처했으나 하루 콩 몇 쪽, 혹은 열매 한 알, 나무뿌리 등으로 공양하며 그간 공부해 왔던 하나 하나를 점검하고 실험하고 적용하며 확인해 나갔다.
스님은 병고액난에 빠진 사람들을 만나면 문득 대자비의 마음을 일으키니 얼마 지나지 않아 구병救病되거나 액난에서 벗어나는 예가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때마다 스님은 "이는 나의 힘이 아니고 사람마다 각자 지니고 있는 자성불自性佛의 위신력威神力이라, 스스로에게 갖춰진 능력으로 이루어진 공덕功德이니 모름지기 사람마다 자신의 근본根本을 믿고서 모든 일을 그에 맡기고, 항상 주처主處를 관觀하라." 가르쳤다.
이후 스님은 원하는 바마다 응해주어도 그릇이 비면 또 찾아와 채워달라고 애원하는 중생들을 보고 각자 자신마다 지니고 있는 내면의 영원한 보물을 알지 못하고 동냥만 하고 사는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겨 이들을 가르치고자 하산했다.
이에 불자들이 도량 건립을 간청하는지라 스님은 1972년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에 한마음선원禪院을 창건했다. 불자들의 수가 점점 더 늘어감에 따라, 2차례에 걸쳐 선원을 중축, 3천여 명이 동시에 법회를 볼 수 있는 규모로 불사가 이루어졌다.
이후에도 전국에서 수많은 이들이 스님의 가르침에 귀의하고자 모여들었으며 각 지역에는 속속 지원支院이 건립됐다. 이 지원들은 각 지역의 불자들이 스님의 가르침을 더 가까이서 배우고자 스스로 발심하여 자발적으로 세운 것이니, 봄이 오면 꽃이 만발하듯 지극히 자연스러운 무위無爲의 불사佛事였다. 자생적으로 국내에서 지원이 늘어가는 것과 때를 같이 하여 미국의 불자들도 호응, 1987년 6월 캘리포니아 모건힐에 첫 해외 지원이 생겼다. 1999년 태국 지원, 2004년 브라질 지원이 개원하는 등 2018년 현재 국내 지원 15곳과 10곳의 국외 지원에서 현지 불자들이 스님의 가르침을 통해 참다운 자성의 길에 들어서는 마음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스님의 가르침은 급변하는 물질 문화 속에서 방황하는 현대인들에게 ‘우리가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알 수 있도록 이끌어주었다. 오로지 자기의 근본 불성을 믿고 일체를 맡겨놓는 관법 수행을 통해 각자에게 본래로 갖추어져 있는 ‘참나’를 발견, 자기 인생의 진정한 주인으로 사는 길을 일러주느라 스님은 영일이 없는 삶을 살았다. 스님은 “나는 무엇이 되기 위해서 이 공부를 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내가 누군가를 알고자 애썼을 뿐이다. 불법을 제대로 공부한 적도 들어본 적도 없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과 일치했을 따름이다.”고 회고했다.
수행 과정이 그러했기에 스님의 가르침은 알음알이나 형식이 아니라 실천행을 항상 중요시했다. 생활을 떠난 ‘도(道)’가 아닌 각자의 생활 속에서 불법의 맛을 볼 수 있게 함으로써 마음공부라는 실질적인 생활 참선의 영역을 크게 열어보였다. 자기의 근본 불성에 의지하여 밝게 깨칠 수 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준 스님의 가르침은 무명無明의 오랜 가뭄 뒤에 내리는 단비와 같은 감로수가 돼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밝히고 있다.
한마음선원에서는 스님 가르침의 뜻을 받들어 사부대중이 꾸준히 정진해 오고 있으며 매년 행해지는 학술제 음악제 등을 통하여 세상에 널리 마음공부의 이치를 전하고 있다. 스님은 2012년 임진壬辰년 부처님오신날 장엄등 점등식에 참석, 각자 근본 마음이 본래 영원히 밝아 있음을 전해주고 음력 4월 초하루 입적했다.
*한마음선원 통영지원에서는 어린이 법회가 매주 토요일 오후 2시에 진행됩니다.
한산신문 hannews@chol.com
삶의 지혜를 밝혀주는 대행선사의 가르침
평생 참나와 실천행을 몸소 보여준 대행 선사
근본적인 물음 1. "나는 누구인가?"
내가 세상에 나고서 세상은 벌어졌다. 내가 나오면서 가정이 생겼고 상대가 생겼으니 이 세상 우주전체가 벌어진 것이다. 그러니 '나'를 빼놓고 무엇을 이 세상이라하며, 무엇을 진리라하겠는가? 보고, 듣고, 말하고, 앉고, 서고,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 소소영영(昭昭靈靈)하게 응대하는 이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야 그냥 나일 뿐이지 무어겠느냐?' 싶을지도 모르나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나'라는 것이 단순히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합쳐져 생긴 물질적인 결합일 뿐인가? 아니다.
'현재의 나'를 형성시킨 나의 근본, 나의 뿌리인 진정한 내가 있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여 없다고 단정 지을 것인가?
육신은 하나의 껍데기이다. 육신을 움직이는 그 무엇은 따로 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은 육신을 '실제의 나'라고 느끼고 있다. 그러나 사실, 헐고 닳게 되면 버려야 할 포대자루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 안에다 이것저것 주워 담고는 그것이 '나'라고 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육신이란 입다가 낡아지면 갈아입는 옷처럼 영원하지 않으니 그 무상함을 지켜보라. 나의 생각 또한 영원치 않음을 지켜보라. 고(苦)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통 받다 사라지는 미미한 존재에 불과한가? 아니다. 가만히 지켜보면 헌 옷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 주재자, 참나가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바로 '참나'인 주인공으로부터 나온 것이니 오직 '참나'를 찾고자 노력해야 한다. 육신은 '참나'에서 나타난 싹, 잎사귀, 가지와 같은 것이거늘, 뿌리를 놓아두고 어찌 가지나 잎사귀를 자기라 할 것인가?
한산신문 hannews@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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